“듣지 마세요! 걸으세요, 이야기하세요!”
“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내 이름은 에릭 사티다. 다들 그렇듯이.”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 음악의 역사에서 독자적 광채를 내뿜는 에릭 사티의 작품에는 엇갈리는 갖가지 해석이 뒤따랐다. 갖가지 미디어가 혼합된 그의 작품의 밑바탕에는 전통적 미학에 대한 삐딱한 도전적인 태도가 깔려 있었다.‘음악계의 이단아’ 사티는 언어의 곡예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은 그의 음악만큼 기이하기 짝이 없다. 사티는 왜 썼을까. 사티를 둘러싼 맥락은 무엇이며, 기이한 글의 의미는 무엇인가.일본의 음악학자 시이나 료스케는 그 자체로 대단히 독특한 사티의 작품과 그의 뜻 모를 말들을 ‘사티의 시각’으로 읽어내기 위해 사티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을 샅샅이 파헤쳤다. 엉뚱한 재치로 가득한 사티의 글로 만나는 그의 세계관, 『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를 사티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선사한다.
사티의 악보 속 언어는 강렬한 아이러니를 표출하게 된다. 아르망고는 여기에서 당시의 예술적·문화적 교류의 영향을 거듭 읽어낸다(스트라빈스키, 미래파, 다다이즘, 디아길레프, 조르주 오리크, 앙리-피에르 로셰 등과의 만남). 이러한 다양한 교류를 통해 갖가지 미디어가 혼합된 형태의 작품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종래의 전통적 미학에 대한, 정면을 피해 가는 삐딱한 도전적인 태도(아이러니 형식을 취한)가 깔려 있었다.
요컨대 사티에게는 두 대의 피아노가 있었다. 그러나 사티가 죽고 나서, 홀로 살며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그의 집에 들어간 사람들이 발견한 피아노는 - 여러 명이 증언하는 바람에 뒤죽박죽이지만 - 건반이 벽을 맞대고 있었다거나, 두 대 모두 세로로 놓여 있었다(!)거나 혹은 페달이 끈으로 결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지 사티는 집에서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이웃집에서 클레멘티의 곡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 얼마나 슬픈가” 하고 반응하는, 피아노를 위한 《관료적인 소나티네》다. 피아노 소음 공해는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사티가 혼자 살았던 집에는 그가 늘 고수했던 차림새 - 중산모자, 흰 셔츠에 검은 프록코트(당시 중급 관리의 일반적인 복장) - 를 이루는 완전히 똑같은 옷이 여러 벌 있었다(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깨비 Q타로’의 옷장 서랍이 떠오른다). 그 밖에 약 100개의 우산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것도 여럿이었다고 한다. 사티와 우산은 그야말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였다. 이에 대해서는 오르넬라 볼타가 솜씨 좋게 정리해두었는데, 사티는 폴리냐크 공작 부인이나 러시아 발레단장 디아길레프로부터 작곡료를 받는 즉시 “가죽 우산”을 사거나 “하루에 하나씩 우산”을 샀다. 조르주 오리크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오리크가 무심결에 사티의 우산을 망가뜨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티는 세속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거물 행세’ ‘위세 좋은 놈들’을 싫어했다. 기묘하게도 그는 거물 행세의 대표적인 예로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 뱅상 댕디는 “교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세를 부리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사티에게는 훈장이나 로마 대상(大賞) 역시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티의 콤플렉스의 반영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명예를 바랐다. 손에 넣을 수 없어서 차라리 경멸하는 편을 택했을 뿐. 훈장을 거부한 라벨이나 로마 대상을 수상한 드뷔시에 대한 사티의 아이러니한 태도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1912년, 사티는 파리의 살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의 글이 국제음악협회에서 발행하는 〈S. I. M. 음악 잡지〉에 잇따라 게재되고(「건망증 환자의 회상」 「어느 바보[나]의 의견」), 아들린 랑트네가 부르는 《‘제국 극장’의 디바》가 파테 사(社)에 의해 녹음되었으며, 6월에는 롤랑 마뉘엘의 관현악판 편곡과 지휘로 사티의 《‘천국의 영웅적인 문’ 전주곡》이 연주되었다. 1913년 4월 5일에는 라벨의 소개로 사티와 알게 된 피아니스트 비녜스가 국민음악협회에서 《(개를 위한) 흐물흐물한 진짜 전주곡》을 초연했다. 이후 파리음악원에서 《자동 기록》을 초연하며 프랑스 안팎으로 사티의 작품이 울려 퍼졌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했던 사티에게 네 살 위의 드뷔시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1891년,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원 스승 에르네스트 기로의 수업에 청강생으로 사티를 추천했다. 1896년에는 사티의 《짐노페디》를 관현악판으로 편곡하고, 이듬해 에라르 홀에서 연주했다. 사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02년 드뷔시가 쓴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원인이었다.
사티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던 걸까. 브랑쿠시 역시 〈플라톤〉(1919) 〈소크라테스〉(1922) 〈소크라테스의 독배〉(1933)를 제작한다. 나아가 본래 추상적이었던 브랑쿠시의 작품은 점점 ‘희어져’,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대표작 〈입맞춤〉을 비롯해 〈잠자는 뮤즈〉 〈공간의 새〉까지 실로 ‘새하얗’다. 사티가 브랑쿠시의 예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이 정도였다. 브랑쿠시는 진심으로 사티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1925년에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죽어가는 사티에게 손수 만든 특제 수프(아마도 ‘흰’ 닭고기 수프)를 챙겨 가 먹였다. 브랑쿠시의 조수들은 사티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브랑쿠시의 읊조림을 들을 수 있었다.“사티여, 어째서 죽어버렸단 말인가…….”
어느 날, 사티와 레제는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든 요란스러운 음악이 들려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티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가구 음악을 실현시킬 필요가 있겠군요. 요컨대 주위의 소음과 하나가 된 음악, 그것을 고려한 음악 말입니다. 내 생각에 이 음악은 선율적이고, 주의를 끌지 않으며, 나이프나 포크가 내는 소리를 덮어버리는 대신 누그러뜨립니다. 자리를 함께한 이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무거운 침묵을 채워주고, 인관관계의 일상적 상투성도 피하게 도와줍니다. 동시에 무분별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거리의 소음도 중화시켜주지요.”
사티는 스스로를 ‘음악가’가 아닌 ‘음향 측정가’로 정의한다. 푸에의 말을 거꾸로 이용한 것이다. 푸에가 자신을 ‘음악가’(카스티용이나 슈비야르 같은 이류 작곡가도 포함된)로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해 ‘바라지도 않았다’고 응수했다고 할까. 드뷔시의 진가도 모르는 인간이 뭔들 알까 싶은 기분도 있었을 테다. 동시에 이 아이러니한 유머는 사티 자신에게도 그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즉 아무래도 자신은 예술가가 못 되며, 따라서 자신이 하는 일은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도치 않게 언어화한, 생각지도 못한 발견이 아니었을까? ‘예술’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로 ‘과학’이다. 냉정하고 냉철한 태도로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기록’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ISBN 9791186561867
출간일 2023년 11월 11일
320쪽, 126x197x21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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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 : 에릭 사티가 남긴 서른 구절의 말